느림의 미학, 눈물의 은퇴 소감 "부족한 실력에도 많은 걸 이뤘다"
2022.01.20 15:35:36

 



[OSEN=잠실, 이후광 기자] 130km의 아리랑볼로 KBO리그를 주름잡았던 느림의 미학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유희관은 20일 오후 서울 잠실구장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정든 그라운드를 떠나는 소회를 밝혔다. 김태형 감독, 박세혁, 홍건희, 최원준이 대표로 참석해 제자와 동료의 마지막을 기념했다.

유희관은 두산을 대표하는 좌완투수였다. 장충고-중앙대를 나와 2009년 2차 6라운드 42순위 지명을 받은 그는 ‘느린 공으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편견을 딛고 2013년 데뷔 첫 10승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8년 연속 두 자릿수 승수를 거뒀다. 이는 이강철, 정민철, 장원준 등 리그 최정상급 투수에게만 허락된 대기록이었다.

2020시즌을 마치고 1년 총액 10억원에 FA 계약을 맺은 유희관은 지난해 9월 19일 고척 키움전에서 두산 좌완투수로는 최초로 100승 고지에 오르는 금자탑을 세웠다. KBO 역대 32번째, 좌완 7번째 100승 대열에 합류한 순간이었다.

유희관은 지난해 11월 보류선수 명단에 이름을 올리며 현역 연장을 추진했지만 오랜 고민 끝 후배들에게 자리를 내주기로 결정했다. 통산 281경기 101승 69패 평균자책점 4.58을 남기고 지난 18일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다음은 유희관과의 일문일답이다.

-은퇴 소감

미디어데이 행사 등을 해서 안 떨릴 줄 알았는데 떨린다. 먼저 이렇게 영광스럽고 의미있는 자리 만들어주신 구단주님을 비롯한 두산 프런트에게 감사드린다. 신인 입단 때부터 많이 부족했는데 날 아껴주신 두산 역대 감독님들, 지도해주신 많은 코치님들, 같이 땀 흘리면서 고생하고 가족보다 자주 봤고 영광스러운 자리를 위해 함께 달려온 많은 선후배, 동료들에게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두산 팬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항상 잘할 때나 못할 때나 격려, 질책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했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유니폼을 벗는 게 실감이 나나

여기 오기 전까지는 실감이 안 났다. 이 자리에 있으니 이제야 유니폼 벗는 게 실감이 난다. 하루이틀 한 게 아니고 25년을 야구했기 때문에 지금도 믿기지 않지만 이런 자리에 올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선수다. 슬픈 날이지만 추운데도 여러분들이 계셨기 때문에 그래도 내가 야구를 하면서 정말 열심히 했고 정말 행복한 선수라는 생각이 든다.

-느림의 미학이 본인에게 주는 의미는

날 대변할 수 있는 좋은 애칭이다. 나 또한 이렇게 프로 와서 느린 공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의문을 갖고 야구를 했는데 주변에서도 그렇고 여기 계신 모든 분들도 1, 2년 하다보면 안 될 것이라고 하셨지만 남들 보이지 않게 노력한 부분이 있었고, 좋은 팀을 만나서 편견을 깨고 은퇴 기자회견을 할 수 있는 선수로 거듭난 것 같다.

-언제 은퇴를 결심했나

사람이라면 항상 마지막을 생각하는 것 같다. 모든 선수가 언젠가는 은퇴를 하고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했다. 작년에 많이 부진했고 2군에 가 있던 시간이 많았고 처음으로 1군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빠졌다. 후배들 모습을 보면서 이제는 내가 후배들에게 자리를 물려줘도 된다는 마음이 많이 생겼다. 후배들 성장을 보며 많이 흐뭇했고 이제는 후배들이 명문 두산을 잘 이끌어갈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오히려 2군에서 날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에 대해 고심을 많이 했고 작년 그 순간이 제2의 인생을 생각한 시기였다.

-올해 연봉 협상도 은퇴에 영향이 있었나

연봉 문제 때문에 은퇴하는 건 아니다. 확신이 많이 사라진 게 사실이었다. 예전의 좋은 모습을 다시 보여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팀 내 좋은 투수가 많이 성장하고 있는데 방해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때 떠나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제2의 인생은

여러 방면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못 만났던 분들 만나면서 조언도 듣고 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에 나조차 제2의 인생이 궁금하다. 그 때도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해설위원 제의는 받았나

3군데서 다 받았다. 너무 감사한 일이다. 야구를 그만뒀을 때 정말 너무 막막할 것 같고 해야할 일이 없고 야구장 출근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었는데 찾아주신 분들이 많아서 행복하고 감사했다. 해설위원이 될지도 모르고 방송을 할지도 모르고 코치를 할 수도 있어서 일이 주어진다면 다 열심히 할 것이다. 방송 쪽에서 많이 연락이 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프로 첫 승이다. 2013년 5월 4일.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니퍼트 대체선발로 나서 첫 승을 했다. 그 1이라는 숫자가 있어서 101도 있었다. 가장 기뻤던 순간은 2015년 첫 우승 때였다.

-장호연 109승을 깨지 못한 아쉬움도 있을 것 같다

아쉬움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항상 그런 기록을 의식하고 야구하지 않았지만 그런 기록을 목표로 삼았기 때문에 나아갈 수 있었다. 두산 최다승 깨고 싶었지만 아쉽게 유니폼을 벗게 됐다. 나보다 더 뛰어난 후배들이 내 기록뿐만 아니라 장호연 선배님 기록도 깼으면 좋겠다. 그래야 두산이 명문팀으로 갈 수 있다. 앞으로 더 나올 것이다.

-다시 태어나면 어떤 종목을 하고 싶나

야구 빼고는 다 할 것 같다. 공으로 하는 운동을 다 잘해서 딱히 야구 빼고 뭘 했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지만 다른 스포츠에서도 열심히 하지 않았을까. 너무 쉼없이 달려와서 야구는 가슴 속에 담아두겠다. 

-국가대표에 대한 아쉬움은

나갔으면 잘할 수 있었다. 아쉽다. 내 공이 느렸기 때문에 어느 정도 통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많았고 그래서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뽑히지 않은 것이다. 다른 일을 하면 그 쪽의 대표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기억에 남는 팬들의 끝인사는

이렇게 악플이 아닌 선플 받은 게 오랜만이다. 그 동안 감사했다는 말이 너무 많았다. 다시는 그라운드에서 볼 수 없다는 말이 마음을 울렸다. SNS에 일일이 댓글을 다 달아드렸다. 팬이 없으면 야구선수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집에서 메시지를 보면서 혼자 울컥했다.

-SNS에 나를 미워했던 팬들에게도 감사하다고 글을 썼다

악플보다 무서운 게 무플이다. 그것도 관심의 일종이다. 당사자는 많이 속이 상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분들도 나에 대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신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도 감사하다. 모두가 날 좋아할 순 없다. 넓게 보면 야구팬들인데 야구팬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은퇴 후 가장 슬퍼했던 동료를 꼽자면

후배들에게 미안하다. 투수조장하면서 잔소리도 많이 했고 모질게도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모두가 연락이 왔고 양의지, 김현수, 이원석, 최주환 등도 수고했다고 말해줬다. 한편으로는  후배들을 위해서 더 좋은 말을 해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 잘 챙겨주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 잔소리 듣느라고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해주고 싶다.

-선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그들을 보면서 프로 생활을 많이 배웠다. 선배님들이 없었다면 이 자리에 내가 없었다. 두산만의 선후배간의 끈끈한 문화를 보며 크게 성장했다. 아무리 야구를 잘하고 대단한 선수일지 몰라도 선후배 문화를 지켜야 하기 때문에 그런 걸 후배들에게 잘 설명했다. 후배들이 그런 문화를 유지하면서 두산이 명문팀이 되는 데 힘써줬으면 좋겠다.

-김태형 감독님과 나눈 말은

감독님이 고생했다고 말씀해주셨다. 좋은 기억과 안 좋은 기억이 있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다. 티격태격했던 기억이 많다. 감독님이 날 아들처럼 많이 챙겨주셨다. 첫 부임 때 우리가 우승을 했고 그 때가 커리어 하이였기 때문에 감독님이 있어서 내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감독님도 많이 아쉬워하셨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인생을 살 때 더 멋지고 좋은 일만 가득하라는 덕담을 해주셨다.

-선수생활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순간은

8년 연속 10승이 그랬다. 100승을 한 것도 팬들의 편견을 조금이나마 깬 것 같다. 그러나 나 혼자 이뤄낼 수 없는 기록이었다. 두산이라는 좋은 팀, 동료, 감독, 코치님들 만나서 한 것이다. 돌이켜보면 혼자할 수 있는 기록들이 아니다. 그들이 없었다면 은퇴 기자회견 할 수 없었다. 웃으면서 행복하게 야구인생을 마칠 수 없지 않았나 싶다.

-팬들에게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팬들을 가장 생각했던, 그리고 두산을 너무 사랑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지금 여기서 더 이상 야구를 못하고 은퇴하지만 팬들께서 두산을 많이 사랑해주시고 두산을 넘어서 프로야구를 많이 사랑해주셔서 야구 인기를 되찾게끔 선수들이 더 열심히 노력하고 잘해야겠지만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린다. /backlight@osen.co.kr